6․25의 기억
어느 여름날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굉음이었다.
잠시 후 부모님이 밭에서 일하다 마시고 급히 집으로 달려들어 오셨다. 포탄이 떨어졌다고 하시면서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날 밤 집 앞 산 속에서 피난을 하였다.
다음날 우리 동네는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계속 긴장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물론 학교에는 등교하지 않았다.
어느 늦가을 어머니께서는 서둘러 피난을 가자고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피난을 가나 안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시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이웃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떠났다고 하니까 우리도 뒤늦게 피난길에 오르기로 하였다. 떠나기 전 옥수수와 벼 그리고 잡곡 등 농사지은 곡식을 땅에 묻기도 하고 숨기기도하고 기르던 가축 (닭, 돼지)은 도살하여 먹어치우기도 하였다. 이때 숙부님은 이미 청년방위대(약칭 청방위)에 징집되어 안 계셨고 숙모는 어린 사촌 여동생을 업고 나의 부모님과 누님 등 모두 여섯 명이 소를 몰고 이부자리와 양식을 약간 짊어지고 면온으로 넘어가서 먼 일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소는 그 집에 맡겨놓고 새벽에 장평을 거쳐 남으로 피난민들의 대열에 끼어 걷기 시작하였다.
큰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구경하였다. 군용 쓰리쿼터 였던 것 같다.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먼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틀째는 발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버님의 이불 짐 위에 업혀서 피난가던 생각이 뚜렷하다. 그러니 우리는 피난행렬의 맨 뒤에 처지게 되었고 가다가 저물면 이미 피난을 떠난 빈집에 들어가서 버려 두고 간 곡식으로 끼니를 해 먹으면서 묵어 가기를 여러날 계속 하다가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국군 보국대에서 아군의 실탄 등 무기를 운반하는데 동원되었는데 그 날 밤 벽지 어느 집에서 묵고 있노라니 전투가 벌어져 온 식구가 겁에 질려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음날 아버지께서 우리 식구들과 다시 만나 피난길에 합류하였으나 아버님은 그 날 밤 얼음이 꽁꽁 언 다리 밑에서 밤새도록 대피하고 계셨기 때문에 발에 동상을 입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전투를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녹전리 전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는 수 없이 피난을 중단하고 어느 집에서 치료를 하다가 다시 북상하는 피난민 대열에 끼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던 날이 나의 할머니 제사 날 (1951년 음력 2월 16일 3월 중순 경)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 집은 폭격을 맞아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온 식구가 망연자실하였다. 어머니는 넋을 잃고 울고 계셨고 아버지는 동상에 걸린 다리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움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숙부님이 살던 안서내로 집을 옮긴 뒤 재기의 노력을 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며칠 후 집안 살림을 다시 추슬러보니 면온에 남겨 두었던 소는 어미는 행방을 모르고 송아지는 살아 있었고 피난 떠날 때 두고 간 곡식 중 땅에 묻었던 옥수수 2가마니가 식량의 전부였다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다시 그 해의 농사를 지어야하는데 소가 없어서 밭을 일구어 내기 어려워서 일소와 밭을 교환하여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다.
바로 그 해 1951년은 초근 목피로 연명을 하며 한해의 농사를 지어나갔다고 한다.
그 후 송아지와 어미 소가 다음 해부터 새끼를 낳아 남에게 위탁 사육을 시켜 5년 간 소가 20여 두로 늘어나게 되었다.
1951년은 전쟁 후유증과 질병과 숙부의 사망 소식 등 우리 부모님은 고통과 좌절이 연속된 한해였다.
아버님의 동상은 결국 모든 발가락을 잃는 후유증을 앓았고 청년방위대에 징용되었던 숙부(그당시 29세)는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후 장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봉평으로 출가한 둘째 누님의 사망 소식과 횡성으로 출가한 큰 누님이 전쟁 때 사산하여 후유증으로 부종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과 의용군에 끌려간 큰 매형의 소식은 두절되었으며 우리집안에도 전염병으로 사촌여동생(수자)이 사망하였고 셋째 누님과 나는 1개월이상 앓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다음해 숙모는 개가하였고 서천 마을에서도 평균 가구당 1명이상이 전염병에 목숨을 잃는 것을 수 없이 목격하였다.
전쟁 후 아이들의 놀이문화는 전쟁 놀이가 주종을 이루었다. 동네 별로 한편이 되어 마을과 마을 대항으로 서로 투석전을 벌이는 일이 많았고 탄피를 이용해서 서로 따먹기 놀이도 하였다.
특히 집집마다 쓰레기 더미에서 총을 많이 습득하였다. 인민군이 쓰다가 버린 아카보 소총, 아군이 쓰다가 버리고 간 엠원 소총, 그뿐인가 산마루 방공호에 무진장 버리고 간 탄약, 포탄 등이 부지기수였다. 실제로 나는 9살 때 사격을 해 보았다. 친구들이 깊은 산에 가서 쏘는 것을 나도 직접 경험하였다.
그래서 낮에도 총소리가 자주 들리곤 하였고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도 낮에는 어디에선가 숨어 있다가 밤에만 집으로 들어왔다. 피난 후에 돌아온 식구들을 반갑게 맞이하던 강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모두가 전쟁의 후유증이었으며 누구나 아픈 기억으로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안전사고에 특히 주의를 당부하셨다. 위방 불입(위험한 곳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이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