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시절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유포리 2구 西川(서내)이란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뒷동산은 큰 솔밭이고 집 옆 동쪽으로는 작은 골짜기 물이 흐르는 도랑이 안서내(내서천)에서 흘러 내렸고 서쪽으로는 바깥 서내(외서천)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집 앞쪽에서 만나는 합수 지점에 있었다.
집 앞에는 해마다 가을이면 군것질 감을 제공해 주던 큰 밤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고 서쪽에는 폭포를 이루는 냇가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그리고 하천 가에는 우리 논이 있고 냇가 포구에는 수많은 버드나무가 있어 유포리(柳浦里)라는 지명이 붙여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25사변 전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여름에는 누나와 이웃에 사는 누나 친구들과 냇가에 나가 고기도 잡고 물장구도 치며 놀았으며 아버님으로부터 천자문, 동몽선습 등 한문을 배우고 붓글씨도 쓰면서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자랐다.
6살 때 서천국민학교(현재 폐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곳은 오지 산골 마을이어서 선생님도 모자라서 동네 아저씨가 한글과 구구단정도를 가르쳐 준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집에서 배우던 한문책을 책보자기에 싸서 학교에 가져가기도 하고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던 시골뜨기 중에도 가장 못난이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친구들과는 어울려서 자치기도하고 땅바닥에 글씨를 써놓고 흙으로 덮어놓은 다음 알아맞히는 숨은 글자 찾기, 가이셍이라는 놀이. 딱지치기, 사방치기 등 놀이를 즐기면서 놀았다.
하루는 학교 운동장에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데 누가 나의 뒤에서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 뿌리치고 보니 선생님이 싱긋이 웃고 있었다. 참으로 무안하고 창피함을 크게 느꼈다. 그때에 그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놀리기까지 하였던 일이 생각난다.
이렇게 학교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난리가 났다고 하면서 부모님께서 황급히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바로 6․25사변이 일어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