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川의 향수/나의 이야기

나의 뿌리

bogokjh 2012. 3. 12. 10:04

여진족 몰아내고 6진 개척한 용장  김종서 (상)
회령 운두산성은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을 막기 위해 두만강변에 쌓은 성이다.
김종서 장군의 생가 터.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있다.

 -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

 이 시조는 김종서(宗瑞) 장군이 조선조 세종 때 함경도 지방에 6진을 개척할 당시에 읊은 것으로 ‘해동가요’에 실려 전해온다. 김종서 장군은 두만강 연안의 6진(六鎭)을 개척함으로써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4군(四郡) 개척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을 오늘의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확정 짓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김종서와 최윤덕 등이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이 땅을 우리 영토로 개척하기 전까지는 북쪽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후손된 도리로서 이들의 위업을 잊을 수 없다.

 세종대왕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어찌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있었으랴!” 하는 찬사와 더불어 그를 더욱 신임했지만, 한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만일 그 당시 우리의 국력과 군사력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인 만주 대륙을 온전히 수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아무 소용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랴?.

 김종서는 세종 때에 6진을 개척하고 조정에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문종 때에는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야심 많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마각을 드러내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때 가장 먼저 제거된 사람이 바로 김종서였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3대 임금에 걸친 충성으로 일관했다.

 흔히 김종서를 장군이라고 부르고, 또한 그의 별명이 ‘대호(大虎)’요 ‘백두산 호랑이’였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무관이 아니라 문관 출신이었다. 이는 고려조의 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 장군 등의 경우와도 같다고 하겠다.

 지략이 탁월하고 성격이 강직했던 김종서는 고려조가 기울어가던 공민왕 2년(1390)에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도총 벼슬을 하던 김제추(制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그는 태종 5년(1405) 16세 때에 문과에 급제해 태종 15년(1415)에 상서원 지장을 지냈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이른바 혁명 주체인 공신들의 득세로 벼슬다운 벼슬을 못 하다가, 세종 1년(1419)에 사간원 우정언이 됐으며, 그 뒤 지평·집의·우부대언·광주판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6년(1434)에 함길도절제사가 됐다. 과거 급제 29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오늘날의 도지사가 된 것인데, 이는 그의 능력에 비춰 보면 한참 늦은 셈이다. 김종서의 출세가 이처럼 늦은 까닭은 그가 본래부터 윗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이나 하는 성품이 아닌 데다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명한 군주인 세종대왕은 일찍부터 그의 강직한 성품과 출중한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의 절제사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고도 불렀으며, 그 지역의 행정·사법권 및 군사권까지 행사했으므로 문관이면서도 무관의 임무를 겸한 막중한 자리였다.

유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해 문관 벼슬을 지내던 김종서가 무관으로 발탁된 것은 세종대왕이 그를 북방 개척의 적임자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다스리려면 문무겸전의 탁월한 인재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김종서만 한 적임자도 없었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조선왕조 500년간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 황희(黃喜)가 김종서를 강력히 천거하기도 했다. 황희가 북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그곳 사정을 보고하자 세종대왕이 “그러면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을 개척할 적임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황희가 서슴없이 김종서를 추천했다.

 김종서는 비록 키는 작았지만,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무술에도 능하고 담력도 컸으며, 불과 16세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도 뛰어났다. 그가 뒷날 ‘고려사’ 편찬 책임자로 임명된 이유도 그의 학문이 깊었기 때문이다. 또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치적 식견과 행정적 능력도 갖출 만큼 갖췄기에 세종대왕이 그에게 함길도 방면을 맡겼던 것이다.

 여진족이 세력이 강할 때에는 함경도 경성, 평안도 영변까지 침범해 노략질을 벌이기도 했다. 세종 9년(1427)에는 최북단 방어선을 경원부에서 경성으로 후퇴했는데, 이곳도 위험하자 다시 더 남쪽인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주장이 나왔다. 참으로 얼빠진 자들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뒤, 대마도정벌로 왜구의 소굴을 소탕한 세종대왕이 이따위 잠꼬대보다도 못한 얼빠진 소리를 용납할 턱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북방 함경도는 태조 이성계가 개국의 첫발을 내디딘 창업의 발상지가 아닌가.

세종대왕은 국경을 후퇴하자는 신하들의 멍청한 소리에 “조종(祖宗)으로부터 물려받은 강토를 단 한 치도 줄일 수 없다!”면서 영토 개척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세종대왕은 재위 14년(1432) 6월에 경원부는 그대로 경성에 둔 채 여진족이 자주 침범하는 석막에 영북진을 설치하여 방어선을 다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여진족 내부에서 부족 간의 분쟁이 일어났다는 정보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경원 지역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여진의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중요한 보고였다. 이에 세종대왕은 마침내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할 호기가 왔다고 판단해 김종서를 함길도 절제사로 보낸 것이었다.

 이후 김종서는 세종 21년(1439) 형조판서로 입각할 때까지 7년간에 걸쳐 북방 개척을 위해 전심전력했다. 절제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흐트러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북방 변경에서 고생하는 군졸들의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를 위해 군사들을 늘 배불리 먹이는 등 파격적인 최고의 대우를 해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김종서가 사기 진작을 위해 거의 날마다 잔치를 베풀다시피 하자 이를 보고받은 조정 대신들이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여기고 “김종서가 날마다 잔치판을 벌여 국고를 낭비한다”고 중상·모략했다. 그렇게 해서 임금의 신임을 잃게 하자는 의도였으니, 재주라고는 남을 시기하고 헐뜯는 재주밖에 없는 인간은 예나 이제나 이처럼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종서는 이렇게 당당히 항변했다.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1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는 군사들을 후히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아낼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다리를 먹이지만 국경이 정비된 뒤에는 닭다리를 주어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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