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書의 歷史
唐의 張懷瓘의 『書斷』에 의하면 초서는 [속히 시작해서 급히 끝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은 자유로이 속서를 할 수 있는 서체라는 의미이다. 또한 초서는 해서나 행서에 비해서 한걸음 일찍이 발생한 것 같다. 좌우가 상칭이고 정면성이 강한 전서에서는 동세가 있는 초서는 아직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예서때에 파책이 생기고, 정면성도 다소 허물어 지기 시작하므로서 동적인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漢나라가 일어서면서 초서가 생겼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前漢경에는 예서를 속서한 [草隸]가 木簡이나 殘紙에 있다. 前漢말에는 예서의 파책을 붙여 놓은 그대로 이어서 쓴 [章草體]가 생기게 되었다. 前漢때 史遊의 『急就篇』이나 張芝의 『芝白帖』, 삼국시대의 傳皇象의 『急就章』은 章草이다.
머지 않아서 이 파책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연면된 금일의 초서인 [今草]가 생기게 되었다. 후한의 장지는 今草의 창시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草聖이라 칭하기도 하나 개인의 작품은 아닐 것이다.
草書는 문자를 최대한 생략한 최속서체이기 때문에, 모필의 성능이나 역할이 극한에 달할 때, 필자의 정신활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극히 빠른 流動속에서 생기는 조형인 것이다. 이러한 今草의 완성자는, 누가 뭐라해도 東晋의 書聖 王羲之 일 것이다. 따라서 행서에서와 마찬가지로 書道史上에서의 왕희지의 업적은 위대한 것이다. [十七帖]을 비롯하여[初月帖] [遊目帖] 등의 王羲之의 草書群은 서법상 완벽한 것이며, 한편 뛰어난 것이다.
또한 王羲之의 아들인 王獻之도 초서의 명수이며 [鴨頭丸帖]등의 저서가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왕희지의 초서의 이념은 隨의 智永이나 唐의 孫過庭에게 계승되었다. 智永에게는 [眞草千字文]이 있고 孫過庭에게는 [書譜], [草書千字文] 등이 있다. 특히 서보의 진적본은 肉筆이 명료하기 때문에 초서의 기법 연구에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書論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런데 中唐 때에는 해서 행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초서에 있어서도 왕희지의 귀족적이고도 전통적인 서법에 반발하는 혁신적 기풍이 일어났으며, 懷素나 張旭 등이 왕희지와는 전혀 다른 계열의 필법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소위 [狂草體]라는 것이며, 그들은 連綿筆을 구사하면서 자유분방한 필치로서 마구 썼다. 張旭에게는 [自言帖] [肚痛帖] 등이 있고 懷素에게는 [自敍帖] [草書千字文] 등이 있다. 특히 [草書千字文]은 매자에 천금의 가치가 있다하여 [千金帖]이라 칭하기도 하며 일본에서도 존중하고 있다.
宋代에는 蘇東坡, 黃山谷, 米帝 등이 개성적인 초서 로서 새로운 경지를 전개 했으나, 元代에는 趙子昻이 왕희지의 서풍을 답습했다. 또한 明代에는 董其昌, 張瑞圖, 倪(예)元路, 傳山, 王鐸 등이 각각 강한 개성으로 창조성이 풍부한 連綿體의 미를 구가하였으며 淸代에는 현실적인 趙之謙과 낭만적인 何紹基가 뛰어 났다.
일본 초서는 행서에서와 마찬가지로 三筆 즉 空海, 嵯峨天皇, 橘逸勢 또 三跡 즉 小野道風, 藤原佐理, 藤原行成이 뛰어 났으며 [가나]의 발생과도 연관되어 있었고 몇 개의 流派로 갈라져서 시대가 흘렀다.
서보 임서(書譜 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