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세상/서예이야기

서예와 인격수양

bogokjh 2011. 8. 23. 19:35

 

Ⅰ. 緖 論

 

서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동양 특유의 전통예술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모필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예술이다. 또한 문자의 조형적인 특징에 의거하여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 예술적인 구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중국 문자는 물체나 대상을 형상화한 그림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원시적인 그림문자가 점차 실용화와 장식화 등 변화를 거듭하며 예술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예는 文字를 아름답게 표현한 예술로 인식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글자마다 의상(意象)이나 미적인 요소를 생성할 때부터 함축하고 있었다.

서예는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하며,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예 (書藝)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법이나 도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서예라는 말 그대로 글씨(書)를 예술로서의 가치 즉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세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먼저 글씨가 변화해 온 여러 가지 법을 폭넓게 익히고 도를 닦는 마음으로 글씨에 임하며 나아가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서예의 특성은 藝術性, 修身性, 學問性1)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書는 문자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였는데 역사가 悠久하고 자료 또한 풍부하다. 특히 동양문화권에 있어서 書는 실용의 도구를 넘어 문화역량을 끊임없이 발휘해 왔다. 그 속에서 書文化의 가장 큰 특성중에 하나는 書의 연마를 통한 人格修養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조상들은 身 · 言 · 書 · 判이라하여 개인의 인격을 판단하고 사람을 선발하는 척도로 삼아왔는데, 이는 書로써 그의 사람됨 즉 人格의 賢, 不賢에 의하여 書가 평가되기도 하였음을 의미한다.

書와 人格과의 관계를 논한 글로 書與其人, 書則心鏡, 心正則筆正 이라는 말이 전한다. 이는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좋은 글씨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습관이되면 자연히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하여 孔子는 六藝(禮 · 樂 · 射 · 御 · 書 · 數)의 하나로 重要視하였다.

서예는 시대의 변천이나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서예를 표현하는 작가의 내재된 심성과 그 심성을 표현해 내는 내면적인 요소들은 시대가 변하여도 그 根本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書藝術은 書者性情의 發露이며 그 性情을 먼저 다스리는 것이 서예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性情을 다스리고 높은 경지에 이르려면 그 길이 험한 법이다. 서예는 어디까지나 古法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創新을 하지 않으면 수려한 작품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아울러 서예에 대한 폭 넓은 감식안(鑑識眼)과 함양(涵養)을 필요로 하며, 학문을 바탕으로 한 덕성과 수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에 중점을 두어 서예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학문을 바탕으로 한 수양적인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書藝의 修養的 特性

 

1. 書與其人

 

‘書如其人’은 곧 ‘글씨는 그 사람’ 이라는 말로서, 其人의 의미는 그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 교양, 학문 등을 포함한 의미이다. 사람마다 독특한 자기 필체가 있다.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도 사인(Sign)이 그 사람을 대표하는 징표나 印鑑으로도 쓰이고 있다.

글씨는 아무리 잘 써도 소용이 없다. 이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가 되어 있지 못하면 주옥같은 글씨나 작품을 남겨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도산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 그 밖의 존경받은 이의 글씨는 그 작품수준의 고하를 떠나 선호하며, 매국노나 존경받지 못한 이의 書畵작품들은 그 작품이 수려할지언정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글씨를 쓸 때는 한갓 흥미나 아름다움의 창조에만 급급하지 말고, 글씨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고 정서를 함양하며 나아가 더 나은 인격을 형성하는 일에 더 큰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다.

書譜에서 孫過庭은 사람의 성정에 따라 글씨의 품격이 달리 표현된다고 말한다.

 

서예를 배움에 처음에는 어느 한 一家를 宗師로 삼아 정진하지만, 나중에는 첨차 여러 다른 서체로 바뀌게 된다. 이는 사람의 성정과 기호가 각기 다른 까닭에, 결국에는 서예 역시 그 사람의 성정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자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성정이 박실하고 올곧은 사람은 그 서예가 올바르기에 수려함이 부족하다. 강직하여 완고한 사람은 그 서예가 딱딱하고 메마르다. 근엄하고 고지식한 사람은 그 서예 또한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어색한 면이 있다. 경솔하여 제멋대로인 사람은 그 글씨도 규범에서 어긋나는 경향이 있다. 성격이 온화한 사람은 용필이 가냘프고 힘이 없다. 거칠고 급한 사람은 붓놀림이 항상 다급한 면이 있다. 의심이 많아 망설이는 성품의 사람은 용필이 지체되어 그 흐름이 시원하지 못하다. 성정이 굼뜨고 느린 사람은 항상 붓놀림이 우둔하다. 경박하고 옹졸한 사람은 세속의 영향을 잘 받아 글씨 또한 속되다. 이 모든 것은 각기 자신만의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큰 書道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만을 고집한 결과이다.2)

 

손과정은 이 부분에서 개성과 서예의 관계에 나타난 여러 문제를 짚고 있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는 길은 절제 혹은 조절이다. 예컨대 성정이 너무 온화한 사람은 좀 더 힘있고 호방한 쪽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으며, 너무 딱딱하고 고지식한 성격은 근엄함을 조금 절제하여 부드럽고 여유 있게 변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손과정은

 

각각 하나의 글자는 모두 점과 획이 모여 이루어진 것인바, 만약 앞 사람들이 쓴 글씨를 두루 연구하지 아니하고 또한 열심히 연마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반초(班超)3)가 붓을 내던진 일로 변명을 삼거나 혹은 항우(項羽)가 서예를 우습게 생각한 교만을 빌미로 자기만족에 빠져4), 마음대로 붓을 놀려 쓴 글씨로 스스로 하나의 서체를 삼거나 제멋대로 질러놓은 점획으로 자형(字形)을 이루고는, 마음으로는 임모의 방법을 깨닫지 못하고 손으로는 더더욱 붓놀림의 이치를 터득하지 못하면서도 서예의 미묘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어찌 커다란 착오가 아니겠는가!5)

 

이 말은 노력도 하지 않고 필법을 깨닫지 못하면서 멋대로 자기 나름의 서예를 구축하려는 이들을 질타한 내용이다. “앞사람들이 쓴 글씨를 두루 연구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열심히 연마”한다는 것은 서예를 배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자 자세이다. 또한 손과정은 “마음대로 쓴 글씨로써 스스로 하나의 서체를 삼거나 제멋대로 질러놓은 점획으로 字形을 이루는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사람들이 전통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독창과 혁신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退溪先生은 “무릇 書는 心畵이다. 心畵가 드러나는 바는 진실로 그 사람을 미루어 알 수 있다”6) 라고 말하여 書與其人의 의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곧 書가 그 사람의 인격 그 자체가 書에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吳世昌은 書를 통하여 군자와 소인과의 관계를 말하였다. 먼저 군자와 소인이 書를 대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어 書를 통하여 군자와 소인이 구별되는 근원으로 삼았다.

 

무릇 사람의 기예는 비록 같으나 마음을 쓴 즉 다르다. 군자는 藝에 寓意할 따름이요, 소인은 藝에 留意할 따름이다. 藝에 留意하는 것은 工師, 隸匠으로 재주를 팔아 먹기에 힘쓰는 자가 할 바이다. 藝에 寓意하는 자는 高人과 雅士와 같이 마음으로 妙理를 탐구하는 자가 할 바이니, 어찌 이에 留意하여 그 마음을 쌓을 수 있겠는가?7)

 

書에 대한 마음을 씀에 군자는 書에 붙여서 자신의 생각을 寓意하고, 소인은 마음을 오직 이 자체에만 매달린다(留意). 이것이 소인과 군자의 구별이 되는 출발점으로 서를 대하는 자세가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孟子는 대인과 소인을 철저히 구별되는 인간형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몸에는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있으며, 작은 것과 큰 것이 있으니,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 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하야 한다. 작은 것을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고 큰 것을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는 것이다.8)

 

소인은 감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주관심사로 한다면 대인은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실현시키려는 사람이다. 맹자는 감관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을 小體를 기르는 것이라고 하고, 인간의 본질적 욕구9)를 실현시키려는 것을 大體를 기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인의 제일차적 관심사는 진정한 주체성의 확립이다. 이 주체성을 맹자는 大我라고 보고 먼저 대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먼저 大體를 확립하여 놓으면 小體는 大體를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인이 되는 것일 따름이다.”10)라고 하였다. 주체성을 확립한 대인은 인간을 조그마한 소우주로 보아 만물과 일체관을 가진다.

 

만물의 이치가 다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기를 반성하면서 정성을 다하면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고, 힘써 미루어 행하면 인을 구하기란 이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11)

 

자기 반성을 통하여 정성을 하다고 이를 힘써 행하는 것이 大體를 확립하는 것이며, 大人이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소동파는

 

사람의 모습에는 미추가 있으나 군자와 소인의 모습을 가릴 수 없고, 말에는 달변과 눌변이 있으나 군자와 소인의 기를 속일 수 없으며, 글씨에는 工과 拙이 있으나 군자와 소인의 마음을 亂할 수는 없는 것이다.12)

 

라고 말하여 소인이 글씨를 가지고 자신의 내재된 인격을 덮으려 하여도 순간적으로 가릴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덮을 수 없고, 글씨에 소인 됨이 드러나게 된다. 이 또한 書與其人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은

 

무릇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라는 것은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는 형태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것을 보면 군자와 소인이 저절로 나타난다.13)

 

서예에서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나타낸다는 것은 내심의 품격이므로 서예의 미는 곧 사람의 품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 결국 인격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다. 명나라말 의 항목(項穆)14)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예를 논하는 것은 상을 논하는 것과 같고, 서예를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과 같다.15)

 

項穆은 서예가 사람들에게 보고 느끼게 한다고 잘 묘사하였으니, 이는 바로 고귀한 품격을 사람들에게 느끼도록 한다는 말이다.

 

대개 책을 열 때의 처음은 마치 고상한 사람이나 군자가 먼 데서 오는 것 같아 멀리 바라보면 품격이 위엄있고 법이 있으며, 맑고 수려하면서 단정하고 표표하기는 마치 신선과 같고 장대하기는 마치 존귀한 사람과 같다. 그 문에 들어섬에 가까이 살펴보면 기운과 몸체가 채워지고 화목하며, 용모와 거동이 점잖고 그윽하며, 후덕하기는 마치 허하고 어리석은 사람 같고, 위중하기는 마치 산과 같다. 그 자리에 이러러 그릇이 큰 몸가짐이 있고, 말의 기운이 차서 귀를 기울이게 되고, 떨침에 성내지 않고 경계함에 놀라지 않고 유혹함에 옮기지 않고 업신여김에 굴하지 않으면서 도의 기운과 덕이 찬란하여 은근히 무리를 복종시켜 비루하고 인색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라지게 한다.16)

 

項穆은 이 글에서 필획과 형체, 그리고 위치 등의 조형 방면의 일을 완전히 언급하지 않고 단지 용모와 위엄, 그리고 외모와 덕이 빛나는 것 등의 인품 방면을 묘사하였다. 또한 멀리서 바라보는 것, 가까이서 살펴보는 것, 말의 기운이 넘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 등으로 삼단 변화를 하고 있으니, 이는 ?論語?의 “군자는 세 번의 변화가 있으니 바라봄에 위엄이 있고, 다가가면 온화하고 그 말을 들음에 엄숙하다.17)” 하는 것을 모방하였다. 서예와 인격과의 관계에 대하여 蘇東坡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글씨를 논함에 겸하여 그 생평도 논하면서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비록 글씨가 공교하다고 하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18)

 

이 글은 어떤 사람의 품격이 높지 않고 기예가 오히려 공교하다면, 논하는 사람은 겸하여 생평도 함께 논하므로 작품을 가볍게 보니 서예가 비록 교묘하더라도 마침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나라 주화갱(朱和羹)은 [臨池心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글씨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기예에 불과하나 품격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공훈을 세운 사람, 또는 문장이나 절개로 뛰어난 사람은 대대로 그 사람을 깎아 내리지 않고 사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면서 더욱 그의 글씨를 소중하게 여긴다. 따라서 그 사람과 글씨는 함께 천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고 전해지는 것이다.19)

 

이 말의 뜻도 인품과 예술을 비교하여 설명하되 품격이 뛰어난 점을 강조하여 사람의 품격에 따라 그 글씨의 높은 가치를 설명한 말이다.

 

2. 心正則筆正

 

앞서 論한 대로 書는 글씨 쓰는 사람 그대로 그 性情의 發露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心正則筆正또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말 역시 서예의 修養的특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唐나라 穆宗이 柳公權에게 필법을 묻자 이에 대답하기를 “용필은 마음에 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됩니다”(用筆在心 心正則筆正)라고 말했으며, 程明道는 “집필은 공경함에 있으니 이는 배움이다”(執筆在敬 此則是學다)라고 말하였고, 朱熹는 “붓을 잡고 붓털을 적셔 종이를 펴고 먹을 당겨 한 마음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점과 획들을 만든다. 뜻이 방종하면 거칠어지고 연미함을 취하면 의혹되니, 반드시 일이 여기에 있게 하면 정신이 그 덕을 밝게 한다”(握筆濡毫 伸紙引墨 一在其中 點點畫畫 放意則荒 取硏則惑 必有事焉 神明厥德)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서 살펴보면 書藝術의 표현이 도덕적, 윤리적 문제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보여진다. 項穆은

 

유공권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제 말하기를 사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고 하겠다……. 사람은 마음으로 바르게 되고, 글씨는 붓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되어진다. 그러한즉 ?詩經?에서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서예의 커다란 가르침으로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글씨를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붓을 바르게 하고, 그 붓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이른바 성의라는 것은, 즉 이 마음으로 자기를 단정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허하고 변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앎에 이른다는 것은, 즉 이 마음으로 그 득실을 살피고 취하고 버림을 분명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이외에 어찌 다시 말이 있겠는가?20)

 

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大學]과 [中庸]의 글을 인용하여 자신의 서예이론을 설명하였다. 서예의 기본문제는 ‘思無邪’․‘毋不敬’․‘正心誠意’의 정신을 기르는데 있다. 이러한 정신이 있으면 글씨는 반드시 아름다워질 것이니,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이외에 별도의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집필이나 운필, 결구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먼저 그 ‘器’를 이롭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그렇지만 이러한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먼저 중요하게 여긴 말이다.

 

3. 技藝와 修養

 

淸代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에서

 

“배우는 사람이 만약 1천개의 비를 보고 이를 좋게 임서할 수 있고도 글씨를 쓸 수 없는 자는 아직 있지 아니하다. 1백개의 비를 두루 임서하면 스스로 하나의 체를 이룰 수 있다”21)

 

이 말은 수많은 비들을 보고 두루 임서하여 좋은 점을 흡수하면 스스로 하나의 서체를 이룰 수 있고 스스로의 풍격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이처럼 秋史는 작가의 精神性을 중요하게 여겨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법은 사람마다 전수해 줄 수 있지만 精神과 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精神이 없는 것은 書法이 아무리 볼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할 수 없으며, 흥회가 없는 것은 글자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간판장이란 말밖에는 못 듣는다. 가슴속에 기세가 잠재해 있으면 글자와 행간에 流露되어 혹은 웅장하고 혹은 紆餘하여 막으려해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겨우 點․劃의 면에서 기세를 논한다면 아직도 한 단계 떨어져 있는 것이다.22)

 

秋史는 아무리 훌륭하게 形模한 글씨라 하더라도 작가의 정신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보잘것없는 하나의 글자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藝術的 가치로 평가될 수 없다. 그리고 精神과 興會는 學問과 인격을 닦아 걸림 없는 마음이 되어서, 그것이 붓을 통해 표출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속의 기세 또한 자연스럽게 글씨를 통해 표현된다고 한 말이다.

孫過庭은 학서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쓴 글씨를 비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을 스스로 과대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저들을 자신의 울에 가두어 더욱 발전할 길을 막아버린다. 반면 자신을 낮추는 이들은 비록 지나치게 겸손한 바가 있지만, 장차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세상에 배우고도 이루지 못한 자는 있어도 어디 배우지 않고 능히 공을 이룬 이가 있겠는가. 눈앞의 사실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23)

 

‘자신을 스스로 과대하게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발전할 수 있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배움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 孫過庭은 서예 표현의 단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그 운필의 방법은 비록 자신이 안배하는 것이지만 일정한 법칙을 그 안에 설정하는 것은 확실히 그 당시의 靈機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한 점의 오차라도 있으면 예술효과는 천리의 차가 있게 된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잘 알면 여러 서체에 두루 적용하여 능통할 수 있다. 그 이치를 연구함에 각고의 마음으로 정통을 추구하면 글씨를 쓰는 손은 갈수록 숙련될 것이다. 만약 마음과 손의 상응함이 고도로 숙련된 정도에 이르면 書法의 규칙을 깊이 체득하니, 이제 글씨를 써 내림에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 손끝은 다만 마음을 좇을 따름인 경지에 이른다. 시원스런 풍격의 기품이 드러나니 필치가 표일(飄逸)하고 신운(神韻)이 드높다. 마치 상홍양(桑弘洋)의 理財처럼 생각에 도모함이 넓고, 포정(庖丁)의 해우(解牛)처럼 기예가 극도로 숙련된 경지에 이른 것이다.24)

 

여기서는 道와 術, 즉 서예의 이치가 體化된 상태에서 영감과 숙련된 기교가 모두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서예공부가 꾸준히 축적되면 일부러 마음 쓰지 않아도 서예의 도가 바로 발휘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그간 익혔던 기예는 또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손이 익숙하게 되면 모든 조화가 여기서 나오는데 이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련된 된 뒤에 오는 것이다. 이런 예술적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예의 전반적인 큰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사람들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교와 규범을 배우는 것으로 말하자면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보다는 못할 것이다. 思考에서는 연륜이 있을수록 전체적인 틀을 精微하게 이해할 것이고, 臨池공부는 왕성한 정력을 지닌 젊음이 더 큰 노력을 가능케 할 것이다.25)

 

이 말은 [論語]의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26) 와 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으면서 생각하였더니, 이로움이 없었고 배우는 것만 못했다27)의 말과 같이 이해의 노력과 체득의 노력을 겸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孫過庭은 이어서 말하기를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각 단계를 훌륭하게 넘어서면 그때마다 커다란 변화와 진보가 있게 되니, 궁극적으로 그 추구한 바의 최고 경지에 완전히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글자의 점획 안배를 배울 때에는 다만 平正만을 추구하고, 평정을 잘하는 경지에 이르면 이제 험절(險絶)을 추구하고자 하며, 험절의 경지에 완숙하면 반드시 平正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시작할 때는 이러한 것을 이루기가 몹시 어렵다. 중간 정도 진행단계에서는 종종 지나침도 겪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과정이 體化되어 그 도리를 통달하게 된다. 이러한 이치를 통달하는 때에 다다르면, 사람과 서예가 모두 노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28)

 

이 平正에서 險絶 그리고 다시 平正이라는 三時三變論은 손과정이 처음 제창한 것으로, 서예의 단계적 발전에 관한 논설이다. 여기서 마지막 단계인 平正의 정확한 의미를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의 기세를 치세우고 문채 다듬기에 오래도록 정진하여 어느 순간 절정에 이르면, 외려 밋밋하고 풋풋해 보인다. 그러나 기실 그 자리는 단순함을 넘어선 현란함의 극점이다.29)

 

이런 人書俱老의 경지는 孔子가 말한 “五十에 天命을 알았으며, 七十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五十知天命 七十從心所欲不踰矩)라고 말하는 경지이다. 여기에서 험절에서 다시 平正으로 돌아가는 이 과정은 마치 미학 범주의 교졸론 가운데 한 과정인 유교입졸(由巧入拙)의 경지와 흡사하다. 유교입졸이란 바야흐로 졸(拙)의 경지를 나타낼 수 있으려면 반드시 교(巧)의 정련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Ⅲ 結論

 

書藝는 藝術性과 修身性 그리고 學問性의 세 가지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학문을 바탕으로한 修身的 特性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書與其人은 다음 揚雄의 心畵說처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사귀며 마음 속의 소원과 고민 등 각종 생각을 토로하는데는 언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천하의 대사를 두루 논하며 경험 밖에 있는 먼 옛 일을 기록하고 천리 밖에 있는 이에게 소식을 전하는데는 글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라(書, 心畵也.) 하는 것이다. 말과 글을 통해 군자의 인격과 소인의 인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말과 글은 그 사람 마음 속의 은밀한 움직임을 반영해내기 때문이다.30)

 

이처럼 書는 그 사람의 인품과 학문 모두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수양적 특성을 잘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書藝術은 心書와 能書를 동시에 요구한다. 이중 어느 한 곳에 편중되면 조화를 잃어버려 참된 서예를 말할 수 없다. 心正則筆正 또한 글씨를 씀에 있어서 집필이나 운필, 결구 등의 문제에 그 ‘器’보다도 心正이 제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書與其人의 말처럼 서예는 그 사람의 표현이다. 글씨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이나 심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글씨를 함부로 쓰거나 잘못 배워서 글씨가 허물어지면 자기 자신도 허물어져 가는 것이요, 도덕적으로 높은 인품과 더불어 古法을 바탕으로 끝없이 創新하는 노력을 가질 때 비로소 글씨와 더불어 몸과 마음이 윤택해지고 훌륭한 작품도 남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료제공 : 中齋 申允九

 

 

'서예세상 > 서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예의 흥취  (0) 2011.10.03
서예와 건강 (1)  (0) 2011.09.22
[스크랩] 영자팔법(永字八法)  (0) 2011.08.23
왕희지(王羲之)에 대하여  (0) 2011.08.21
서체(書體)의 종류  (0) 2011.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