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조선 문신·장군) [金宗瑞]
1390(공양왕 2)~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장군.
개요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도총제(都摠制) 추(錘)의 아들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상서원 직장(直長), 행대감찰(行臺監察)을 거쳐, 1419년(세종 1)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이어 광주판관(廣州判官)·봉상판관(奉常判官)·의주삭주도(義州朔州道)의 진제경차관(賑濟敬差官)을 지냈으며, 1426년 이조정랑, 1427년 사헌부집의·황해도경차관 등에 올랐다.
1433년(세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으로서 이부지선(吏部之選)을 맡았다. 이 무렵 북쪽 변경에서 우디거[兀狄哈]족을 비롯한 여진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는 대책 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북변 강화의 필요성을 강경하게 주장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북방 경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했다. 마침 1433년 우디거족과 오도리[斡朶里]족이 서로 다투는 등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국토 확장에 뜻을 두고 있던 조정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에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 14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어 7, 8년간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비변책(備邊策)을 올리는 등 6진(六鎭:종성·회령·경원·경흥·온성·부령)을 개척하여 국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1416~43년에 걸쳐 개척된 압록강 방면의 사군(四郡: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토가 두만강·압록강 상류까지 넓어졌다(→ 4군6진). 1440년 서울로 돌아와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그뒤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를 거쳐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判禮曹事)를 겸하였다.
1449년 8월에 달달(達達: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하여 요동지방이 소란해지자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그는 6진을 개척한 용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사 高麗史〉·〈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세종실록〉의 편찬작업을 책임지는 등 학자·관료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1451(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편찬한 〈고려사〉는 본래 1392년(태조 1)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것을 세종 때 몇 차례(1421, 1424, 1442) 개수한 끝에 완성한 것이었다.
〈고려사〉의 편찬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정도전 등 몇몇 개인의 가문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등 공정치 못하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김종서·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薺)·정창손(鄭昌孫) 등이 1449년부터 개찬에 착수하여, 1451년에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의 기전체(紀傳體)의 정사(正史)로 〈고려사〉가 완성되었다. 같은 해 10월 우의정으로 승진, 편년체(編年體)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여, 이듬해인 1452년(단종 즉위년) 〈고려사절요〉 편찬에 참여했다.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癸酉靖難:세조의 왕위찬탈사건)으로 위의 사서들에서 그의 이름은 모두 삭제되었다.
그는 세종 때부터 임금의 신임을 받는 관료로서 성장했다. 문종도 죽음을 앞두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등과 함께 우의정인 그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다.
그러나 세종의 여러 왕자들이 다투어 세력 확장을 도모하는 가운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로 그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다(→ 세조찬위).
수양대군은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 등의 모사(謀士)를 얻은 뒤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유수(柳洙) 등 무사들을 규합, 1453년(단종 1) 10월 13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이날 우선 서대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양정·임운(林芸) 등이 김종서와 아들 승규(承珪)를 살해했다.
뒤이어 이들은 단종에게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기에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우선 죽였다고 아뢰고,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소집한 다음 홍윤성(洪允成) 등을 시켜 황보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을 죽였으며, 정분(鄭)·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 보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1680년(숙종 6) 강화유수 이손(李巽)이 김종서의 억울함을 논하였으며, 1719년(숙종 45)부터 후손들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그의 벼슬이 회복되었다. 종성의 행영사우(行營祠宇)에 제향되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등의 시조가 전한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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